법인격부인(法人格否認)의 법리
(가) 시효란 어떤 사실상태가 법률이 정한 기간 계속되는 경우, 그러한 사실상태가 진실한 권리관계와 일치하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대로 존중하여 권리관계로 인정하고, 그에 적합한 법률효과를 발생시키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민법의 시효 제도에는 소멸시효와 취득시효가 있는데, 소멸시효란 일정 기간 계속하여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때 권리가 소멸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을 말하며, 채권의 소멸시효는 원칙적으로 10년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고 소액의 금액인 경우 등에 대해서는 이보다 짧은 단기소멸시효가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어음을 발행하는 경우 그 지급청구권의 소멸시효는 3년이다. 한편 취득시효란 권리의 행사가 일정 기간 계속된 경우 권리취득의 효과가 발생함을 뜻하는데, 이를테면 민법 제245조 제1항에서는 '20년 동안 소유의 의사를 가지고 평온, 공연하게 부동산을 점유하는 자는 등기를 하면 그 소유권을 취득한다'고 하여 부동산 소유권의 취득시효를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효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어떤 사실상태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이를 부인하였을 때 사회질서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으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실상태가 진정한 권리관계를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을 것으로 보여 증명하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효 제도는 법적안정성을 추구하고 입증곤란을 구제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격언과 같이, 오랜 기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방치한 사람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도 있는데, 특히 소멸시효에 있어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나) 법인은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법률에 의해 권리주체로 인정되어 법인격을 가지며, 권리와 의무의 귀속주체로써 완전한 권리능력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법인격이 특정한 법률관계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부인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A사가 채무 1억 원과 부동산 2억 원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A사는 경영의 악화로 채무 불이행 상태가 되었다. A사는 채권자가 소송을 한다면 부동산을 뺏길 것을 우려하여 B사라는 새로운 회사를 세우고, A사의 부동산을 전부 B사에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 주었다. 이렇게 되면, 만약 채권자가 청구소송에서 승소한다고 하더라도 A사에는 남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1억 원을 받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어떤 법인이 채무면탈이나 법규회피 등과 같은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다른 회사를 신설하는 경우를 법인격의 남용이라고 하며, 이러한 경우에 기존회사의 채권자에 대하여 위 두 회사가 별개의 법인격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 이때 법원은 법인격을 부인하고, "A사와 B사는 동일한 회사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채권자는 B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법인격의 남용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기존회사와 신설회사의 실질적 동일성이라는 객관적 요건이 요구된다. 이는 동일한 대표이사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고, 법원이 경영상태와 자산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가 없는 회사 자산의 이전이 있었는지의 여부이다. 만약 위의 상황에서 A사가 B사에 2억 원짜리 부동산을 팔았다면 A사와 B사의 실질적 동일성은 부정된다.
[사례]
甲은 X사의 대표로 X사는 甲이 사실상 지배하는 회사이다. 乙은 X사로부터 물품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X사에 재료를 공급하였다. X사는 乙에게 물품대금 명목으로 2013. 6. 13.부터 같은 해 11. 19.까지 어음 4억 5천만 원을 교부하였고, 乙은 지급기일에 지급제시를 하였으나 피사취*를 이유로 지급이 거절되었다.
이에 乙은 X사를 상대로 어음금청구의 소를 제기하여 2017. 4. 26. 'X사는 乙에게 4억 5천만 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취지의 승소판결을 받았고, 그 판결은 2017. 5. 12. 확정되었다.
X사는 2015. 3. 31. 주주 전원의 결의에 의하여 해산하고, 법인등기부상 甲이 2015. 4. 14. 청산인으로 등재되어 있다.
Y사는 2015. 7. 7. 설립되었고, 丙이 대표이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丙은 X사의 공장장으로 있던 자로서 Y사의 명의상 대표에 불과하고, X사에서와 동일하게 Y사는 甲을 대표로, 丙을 공장장으로 하여 일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사실관계를 따져 보았을 때 Y사 역시 마찬가지로 甲이 사실상 지배하는 회사임이 인정된다.
* 피사취(被詐取): 어음 발행의 원인관계상의 이유로 그 지급을 거절하는 것으로, 통상 발행인의 지급자금이 부족하여 발생한다.
甲은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1. 乙에게 지급한 약속어음들의 지급기일 중 가장 늦은 2014. 4. 25.부터 기산하여 어음금지급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 3년이 경과하였으므로, 乙의 X사 내지 Y사에 대한 각 어음금지급청구권은 소멸시효 완성으로 소멸하였다.
2. 만약 2017. 5. 12. 확정판결로 어음금지급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중단되었다고 하더라도, 乙의 X사 내지 Y사에 대한 각 어음금지급청구권은 위 판결이 확정된 다음날인 2017. 5. 13.부터 소멸시효가 새로이 진행하여 소멸시효기간 3년이 경과함으로써 소멸하였다.
3. 설령 2017. 5. 12. 확정판결로 인하여 乙의 X사에 대한 어음금지급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이 10년으로 연장되었다고 하더라도, X사와 Y사는 서로 다른 법인이므로 Y사에 대하여는 그 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이 연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乙의 Y사에 대한 어음금지급청구권은 2017. 5. 12.부터 소멸시효가 새로이 진행하여 기존의 소멸시효기간 3년이 경과함으로써 소멸하였다.
[판례]
대법원은 甲의 상고를 기각하고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다.
1. 사정을 종합하여 Y사는 甲이 사실상 지배하는 회사로서 X사와 그 형태 및 내용이 실질적으로 동일한 회사이고, X사의 채무를 면탈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Y사의 설립은 회사제도를 남용한 것이다.
2. 시효제도의 존재 이유는 영속된 사실상태를 존중하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고 특히 소멸시효에 있어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므로, 권리자가 재판상 그 권리를 주장하여 권리 위에 잠자는 것이 아님을 표명한 때에는 시효중단 사유가 된다.
3. 기존회사가 채무를 면탈하기 위하여 기업의 형태·내용이 실질적으로 동일한 신설회사를 설립하였다면, 신설회사의 설립은 기존회사의 채무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회사제도를 남용한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경우에 기존회사의 채권자에 대하여 위 두 회사가 별개의 법인격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으므로, 기존회사의 채권자는 위 두 회사 어느 쪽에 대하여도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4. 기존회사에 대한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설회사가 기존회사와 별도로 자신에 대하여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별개의 법인격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어서 신의성실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
(대판 2024. 3. 28. 2023다2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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